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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널리 자랑하고 싶은 내 남편 2023年12月01日

나는 시집와서 47년간 살아오면서 남편을 너무너무 사랑해왔지만 녀자답지 못하고 부드럽지 못해 남편 앞에서 언제 한번 “여보, 사랑해요”라는 말을 해본 적 없다. 지금 생각하면은 다정스러운 녀자가 아니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항상 남편을 사랑해온 나이다. 지금에라도 이 세상에 남편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필을 들었다.

옛날 말에 “남편, 안해 자랑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했지만 나 인젠 그런 바보가 되더라도 남편자랑을 하려고 한다.

우리 두사람은 47년 전에 남편 친척의 소개로 만나게 되였는데 남편의 첫째 조건은 마음씨 착한 녀자를 대상으로 찾는 것이고 나의 첫째 조건은 인물체격이 좋은 사람이였다. 친척집의 조카가 하는 말이 우리 마을의 많은 처녀들 중 내가 제일 마음씨가 착하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첫 만남에 날 좋아하게 되였고 나도 남자를 만나던 중 인물 체격 제일 좋은 남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만나던 첫날 저녁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남편은 우로 형님 한분이 계셨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일본에 친척이 있으면 군대를 가지 못하는 것이 실정이였는데 촌 부서기로 있는 시아버님이 일본에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시형은 군대로 가지 못하게 되였다. 그로 인해 우리 시형은 아버지와 적수로 되였고 우울증이 오던데로부터 신경문란까지 와서 결혼못할 정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니 둘째인 나의 남편이 량부모와 형님, 그리고 세 동생까지 다 책임져야 했으니 당연히 마음씨 착한 녀자를 택해야 했다.

나는 8남매 중(남자 4명, 녀자 4명) 막내로서 남부러운 것 없이 지내면서 고중까지 공부도 잘했을뿐만 아니라 1학년부터 고중 졸업할 때까지 줄곧 학교에서 간부직(부반장, 학교단총지위원, 학습부)을 맡았다. 그러다 문화대혁명시기 대학시험이 취소되여 대학으로 못갔다. 나는 그저 좋은 대상이나 만나서 자식들을 낳아 훌륭하게 키울 생각으로 요구와 기대를 낮춘 채 남편을 만났다. 그때 우리 가정에서는 더 말할것도 없고 동네에서까지 날 웃으면서 저렇게 똑똑한 녀자가 왜서 성분나쁜 가정으로 가냐며 말들이 많았다.

그때 나는 다른 대상들을 소개하면 그들과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 나는 아버지와 오빠 언니들께 매일 말을 들었고 심지어 오빠한테 매까지 맞았다. 그래도 나는 남편을 택했다. 그러다보니 과부잔치하다싶이 나 혼자 선택으로 시집을 왔다. 정작 시집와보니 고생이 많았다.

아버지와 붕어빵같은 오누이를 낳아서 키우노라니 내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생겼다. 옛날에는 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세월이라 나의 남편이 나와 아들 하나 더 낳아서 큰 아버지를 모시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기했다. 나는 그말도 옳다고 생각되였다. 큰 아들이 엄마, 아버지를 모시고 작은 아들이 큰아버지를 모시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아들 하나 더 낳게 되였다. 시부모, 시형, 시동생들과 자기 세 자식들도 다 책임져야 하니 고생은 끝이 안보였다. 집안이 가난한 탓에 아이들도 저마다 모두 공부해서 출세하겠다는 결심으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 셋은 전부 대학에 갔다. 우리 둘은 한국에 가자니 형편이 못되여 갈 수도 없었고 가정을 살리고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자면 그저 악전고투로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량부모 모두 우리 손으로 장례를 치러 보내드렸고 시형까지 저 세상으로 보냈다. 세 자식들도 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하게 되였으니 행복한 일만 남았다. 이젠 남편은 나를 업고 다닐 지경으로 떠받든다. 어디로 유람 가던지 항상 나를 앞세우고 다닌다. 그럴 때마다 내가 웃으면서 “내가 당신보다 인물, 체격도 못한데 남들이 웃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내가 당신이 좋으면 되지, 남들이 뭐라든 난 당신이 제일이야”라고 말한다.

그뿐이 아니다. 이제는 ‘고난 끝, 행복이 시작되였는데’ 하면서 금목걸이요, 금가락지요, 고급 옷이요, 고급 화장품이요 하면서 수없이 사준다. 그리고 이제는 일하지 말아야 할 나이 칠십이 되였건만 자식들을 위한 그의 마음은 변치 않고 있다. 지난 해도 한전 1쌍 7짐을 부치며 고생해왔고 금년에도 1쌍 8짐 되는 한전 밭을 부치면서 고생한다. 내가 “이젠 그만 고생하고 공부를 많이 시킨 자식들과 생활비를 요구하면서 행복하게 편히 삽시다”라고 하면 남편은 “세 자식들 모두 자기들의 생활이나 잘하면 난 만족이요. 설과 생일에만 인사로 돈을 받고 생활비는 자체로 해결해야지”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남편이 너무너무 사랑스럽다. 이런 남편을 나는 널리 자랑하려고 한다.

/김만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