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묵에 담은 정-저명한 서예가 최원택

2010년 12월 10일, 인민대회당. 모택동 탄신 117돐기 념 대형 서예전시회에 최원택의 ‘심원춘. 눈’ 등 6점의 서예작품이 선을 보였다. 능숙한 필체와 호매로운 풍격, 필획의 다양한 변화와 점, 선, 면의 조화를 이룬 투시각도, 전통과 현대미의 완벽한 결합, 모든것이 필자의 독특한 창작풍격과 다년간 련마한 전통기법을 남김없이 과시했다. 전시회 후, 중국홍색문화활동조직위원회에서 최원택에게 ‘덕재가 겸비한 우수서예가’ 영예칭호를 수여했다.

최원택은 1942년 6월 10일, 흑룡강성 밀산현의 한 지식인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조부의 영향을 받아 서예와 인연을 맺게 되였다. 최원택은 해방초기 소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나라는 가난했고 물자 또한 결핍하여 필묵과 종이도 제때에 살수 없었다. 낡은 신문지, 숙제책 뒤면에 글씨련습을 하기가 일수였다. 서예첩이 없으면 교과서의 생자표를 모방해 썼다.

1963년, 고중을 졸업한 최원택은 가정경제난으로 대학입시를 포기하고 현성에서 40여리 떨어진 백포자공사 식량창고에 림시공으로 배치받았다. 그의 업무는 각종 의기와 부품을 관리하는 일이였다. 비록 림시공 신분이였으나 그는 열심히 일했다.

그가 일에 착수한지 얼마 안되여 주총복이라는 림시공이 배치되여 왔다. 최원택보다 6살 이상인 그는 청화대학 학생이였는데 1958년 “우파”에 몰려 흥개호반 북경 제2로동개조농장에 로동개조를 왔다. 몇년 후, 로동개조에서 풀려난 그는 생계를 위해 백포자 식량창고에 림시공으로 들어왔다. 주총복은 청화대학 인재였다. 언변이 좋고 박식하여 고금중외 모르는것이 없었으며 붓글씨를 특별히 잘 썼다. 주총복과 최원택은 모두 독신이였기에 종업원숙소에 기숙하고 있었다. 주총복은 저녁이면 가물거리는 석유등불 아래서 로동자들에게 “수호전”, “삼국연의” 등 명작들을 들려주었다. 유모아적이고 해학적이며 자유분방한 성격인 그는 로동자들속에서 인기가 많았다. 최원택도 다른 로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밤을 새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사람은 마음속 말을 털어놓는 친구가 되였다. 주총복은 최원택의 서예 천부를 발견하고 최원택과 서예를 담론했다. 그는 “서예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태도와 방법이며 서예예술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이다. 부지런히 배우고 민첩한 사유력을 가져야 하며 제때에 경험을 총화해야 한다. 참답게 모사하고 항심이 있어야 하며 리론을 배우되 거기에 얽매이지는 말아야 한다. 시야를 넓히고 견식을 높이며 학식을 닦아 서예 외의 기능련마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서예가가 되려면 중국서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리론은 앞사람들의 경험, 지혜의 결정체로서 그것을 소화, 흡수하고 나의 것으로 리용해야만 서예련마의 지름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다년간의 서예련마 체득을 털어놓았다.

최원택은 몇명의 서예가들과 접촉한적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주총복 처럼 리론과 실천의 각도에서 서예를 투철하게 강의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최원택은 주총복을 스승으로 삼고 계통적으로 리론을 배우고 기본 훈련을 강화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해 년말, 최원택이 은행시험에 합격되면서 반제하 신용사에 가게 되여 주총복과의 사제인연이 끊기게 된것이다.

/맹고군 저, 김경선, 피금련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