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든 가을의 그녀

그녀의 이름은 리춘련. 내가 그녀와 알게된 것은 지난해 년말 한 위챗 문학방에서였다. 나는 문학방에서 신입을 환영하는 그의 문자를 보고 또 환하게 웃는 프로필 사진에 정이 확 들어 개인 위챗을 추가하였다.

이튿날, 그는 중국조선말방송국 인터뷰 내용을 록음으로 보내왔는데 너무 감동적이였다. 저녁 그한테서 다시 문자가 왔다. 자기가 47년생이니 언니고 54년생 동생인 나에게 본인 이야기를 듣려주고 싶단다.

언니는 흑룡강성 산간 마을의 한 가난한 리씨 가문에서 태여났다. 말귀를 알아들어서부터 ‘빈곤호’란 말을 제일 많이 들었다는데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리해못했고 더 억울한 것은 그것이 언니네 집의 대명사였다는 것이다. 언니는 아래로 동생만 다섯, 엄마는 막내동생을 낳으면서 산후풍으로 장기환자가 되였고 아버지도 쿨럭쿨럭하는 기관지염 환자였다. 식구는 많고 일군은 적어 빚도 가득했다.

“빈곤호, 빈곤호...”철이 들어서부터는 이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단다. 그는 장차 꼭 돈을 벌어 가족들을 ‘빈곤호’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배짱을 키웠다. 하여 언니는 부모들이 돈 벌어오라는 말 한마디 없었음에도 17살에 보조금 받으며 다니던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생산대에 일하러 나갔다.

그해 겨울, 언니가 생산대 탈곡 마당에 나타나자 어르신들은 저 어린게 며칠이나 하겠냐하며 일부러 떠보는 식으로 이것저것 잔 심부름을 시켰다는데 전혀 생각밖이였다. 뭐든지 너무 잘해서 보는 사람마다 엄지를 내들었다.

장화 살 돈도 없이 맨발로 논바닥에 엎드려 모내기 했던 일, 열 손가락 륜번으로 베가면서 견지했던 가을벼베기, 변변한 솜옷 하나도 없이 뛰여들었던 탈곡일... 언니는 하루도 쉬지않고 악착스럽게 힘든 그 시기를 살아냈다. 4년만에 빚도 다 청산했다. 그때 날듯이 기뻤던 언니는 마침내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정의 ‘빈곤호’ 모자를 날려보냈다. 아마 그때 언니의 얼굴엔 철 들어 처음으로 행복의 웃음꽃이 피여났을 것이다.

그리고 24살 되던 해, 이미 7년간 일하는 사이 동생들도 줄줄이 사회에 나와 로임을 받았으니 언니네 생활도 조금 괜찮아졌다. 집에서도 더 늦기전에 어서 빨리 시집을 가라고 닥달했다. 농촌일에 힘 빠졌던 적이 많았던 언니는 그때 월급쟁이한테 시집간다고 마음먹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아마 언니의 팔자가 박복했던지 가난이 떠나가질 않았다. 시집 마을이 친정 마을보다도 더 산골이여서 농사는커녕 국가 판쑈랑(返销粮)을 먹는다는 것이였다. 끼니마다 조밥을 먹는다고? 친정집에서 질리게 먹은 조밥소리가 나오자 언니는 신경이 곤두섰다. 다행히 남편이 월급쟁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일이 또 꼬이였다. 바로 개혁개방이 실시되여 집집마다 땅을 분배받고 난리났는데 농기계참의 림시공이였던 남편이 한심하게 농촌에 내려오게 되였던 것. 이젠 월급도 없고 농사만 지어야 하는 판국이였다. 그런데 남편은 여직까지 차 몰고 수리하는 전문직으로 농사일은 전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단다.

한심했다. 저으기 화가 난 언니는 더는 남편하고 할 말이 없어 혼자 빅 돌아 누워있는데 남편은 ‘잘 배워주면 할수 있소’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둘은 마주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기회는 준비되여 있는 사람한테 온다고 남들은 겨울 되면 집안에 앉아 놀음판 아니면 수다로 보냈지만 언니는 아니였다. 친정집에서 십년 넘게 해오던 새끼꼬기로 부업을 할 예산으로 기계를 빌려왔는데 마침 강 건너 야마공장에서 새끼를 대량 수거한다는 특대 희소식이 전해왔다. 그럼 그렇겠지, 언니는 신났다. 그는 때론 밥먹는 것도 잊은 채 새끼를 꼬았으며 어떤 날에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밤새 새끼만 꼬았다. 아무튼 언니는 꼭꼭 이틀에 한 트럭씩 꽉 박아 싣고 가서 팔았는데 야마창에서는 임신부 혼자 이 많은 새끼를 꽜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단다.

이렇게 온 겨울동안 농사지은 짚으로 새끼를 꼬아 생활비를 벌었고 봄이 오면 남편의 농사기술 지도를 했다. 착한 남편은 언니가 배워주면 곧 잘 따라줬다. 그러면 언니는 시름놓고 다른 부업을 찾아나섰다. 그는 마을에 재단사가 없는 것을 알고 재봉침을 사놓고 옷 수선을 하였다. 결혼할 처녀들의 베개잇, 홰보 등 수놓이도 하였으며 시내 가서 2년간 식당도 꾸려 보았다... 언니의 고생은 헛되지 않았다. 근 15년간 남편과 손 발 잘 맞추어 악전고투한 결과 원래 초가집을 허물고 벽돌 기와집을 짓게 되였다. 집안에도 가전 제품, 가구 등을 버젓이 갖춰놓았다. 거기에다 아들 둘 자식농사도 잘 하였으니 남 부러운 것 없었다. 널직한 객실에서 온 집 식구 함께 40센치 채색 텔레비전을 보는 언니의 얼굴엔 마침내 만족스런 웃음이 어렸다.

그리고 몇년 동안 가까이에서 언니를 지켜보던 대대 지부에서는 언니더러 부녀주임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언니는 자신을 믿는 대대지부가 고마웠다. 언니는 그때까지 마을에 유치원이 없는 것을 잘 아는지라 바로 유치원을 꾸리기로 했다. 마침 그해 현 소수민족 운동대회 개막식에 어린이 집체무 표현이 있어 준비에 몰입하였다. 평생 농사일만 하던 언니가 뭔 경험이 있으련만 언니는 고도의 책임감으로 마을의 능력자들을 힘껏 동원하였다. 학부형들도 적극 협조해 나섰는데 대회날 멋지고 완벽한 집체무는 온 운동장을 들끓게 하였다.

이뿐이 아니다. 한번도 기차를 타 보지 못했다는 부녀들이 많다는 것을 료해한 언니는 농사로 함께 번 돈으로 바로 이듬해에 할빈 태양도에 1박2일 유람을 떠났다. 지금도 그때 그 감격적인 장면을 외우는 사람들이 많단다... 10년 사이 언니는 부녀공작은 물론, 아름다운 마을 가꾸는 일에 혼신을 쏟아왔다. 이러한 노력들로 처음으로 현 ‘3.8’홍기수마을로 선정되였고 언니도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97년 언니는 부녀주임 직을 젊은이에게 맡기고 한국행을 택했다. 2013년 고향에 돌아와 북경에 취직한 두 아들에게 집까지 사서 결혼도 시켰다. 그러고나니 세월과 더불어 언니도 곧 칠순 문턱에 닿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했다지만 지금부터는 아니다.

도대체 뭘하면서 로년을 보낼 것인가?!

언제나 배움에 꾸준했던 언니는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2016년엔 위챗에서 우연히 중국조선말라디오방송을 접했다. 언니는 중국조선말라디오방송은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조선어계정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런저런 조건으로 접촉을 못했다. 언니는 이 방송출연을 꿈에도 그렸다. 그날도 마냥 지정된 시간에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었으며 방송국에서는 한가지 제목을 내주면 청중들이 저마다 글을 써서 올리는데 우수문장으로 선정되면 방송에 나갈 수 있는 이벤트를 시작한다고 알렸다.

얼씨구, 호박이 넝쿨째로 들어왔네! 소학교 때부터 어문과 작문을 제일 좋아했고 커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아 일정한 기초가 있는데다 자신의 인생경력이 받침되니 도전해볼만 했다. 결과 글을 본 방송국 선생들도 70세 넘은 로인 수준이 이만저만 아니라며 높이 칭찬해줬다. 언니는 자기가 쓴 문장이 이름 그대로 사랑의 선률을 타고 방송에 나가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기분이 둥둥 떴다. 방송국에서도 이런 적극적인 독자를 생방송 인터뷰까지 진행했다. 언니의 인생에 평생 있어본 적이 없는 경험, 평범했던 인생은 360도로 바뀌는 기분이였단다.

젊었을 때의 꿈이라고나 할가. 글을 쓰면서 종종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문학세포를 느끼군 한다는 언니는 지난해부터 흑룡강성조선족작가협회에 가입하여 잡지 ‘할빈문학’(8기)에 수필도 발표하고 ‘흑룡강신문’과 ‘고향소식’ 등 위챗 계정에도 글 여러편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족디카시인협회 그룹방 회원으로서 낮이면 폰으로 사진 찍고 거기에 시쓰기를 하는데 이미 쓴 300여편 중 100편씩 묶어 2부 동영상을 그룹에 공유하기도 했다.

152센티의 키에 평범한 76세 녀성, 그는 어릴 적엔 자기 두손으로 가난한 출신을 개변했고 젊은 날엔 고운 청춘을 고향에 바쳤다. 저무는 황혼임에도 그는 항상 자신의 정신세계와 주위환경을 가을날 아름다운 단풍보다도 더 이쁘게 장식하고 있다.

/김성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