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로인절 탄생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족은 예로부터 웃어른들을 공경하는 미풍량속을 간직하였고 로인을 존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으뜸가는 미덕으로 여겨왔다. 그런 풍속이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연변을 중심으로 전국 여러 곳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로인절을 성대히 즐기고 있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고향에 있는 부모들에게 축하메세지를 보내거나 일부러 고향에 찾아와서 나이드신 어른들을 위해 축하잔치를 벌이고 젊은이들과 어린이들 할것 없이 온 가족들이 함께 어울려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노래와 춤으로 즐겁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이 “로인절”은 지난 1982년 8월 15일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현 동성용공사(지금의 룡정시 동성용진)에서 발기되였다. 로인절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림송엽(1945년 2월생)이 당시 동성용공사 부서기로 사업할 때 탄생한것이다.
필자가 당시의 정황을 알아보려고 림송엽 서기를 찾아 갔을 때 그는 웃으면서 “동성용공사에서 로인절이 탄생하게 된 것은 김시룡, 황순옥 등 많은 선배들이 동성용공사에다 훌륭한 기반을 닦아놓은 것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밝혔다.
동성용공사는 전국로동모범 김시룡, 렬군속모범 리옥금, 산골의 녀수재 황순옥, 벼육종가 려근택 등 전국에 명성을 떨친 많은 인물들이 용솟음쳐 나온 곳이다.
림송엽이 당위부서기로 부임될 무렵 이런 인물들이 로년에 들어서게 되였고 또 각 대대에서 서기로거나 주임으로 사업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사업터에서 물러나게 되였는데 이들 속에는 선후로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김시룡, 황순옥 등이 있는가 하면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등 가렬처절한 전쟁마당에서 피를 흐리면서 싸우던 영웅들도 있었으며 인민공사건설에서 많은 공헌을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때 38세였던 림송엽 서기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사업에서도 남다른 패기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1890년대 중반에 조선으로부터 동성용의 림풍촌으로(장남촌)이민와서 서당을 꾸리고 글을 가르치던 훈장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이상분을 존경하는 전통례의범절을 많이 배웠다.
림송엽 서기는 로인들의 지난 공적과 생활형편을 고려하고 무엇인가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어느날 이런 분들에게 얼마간의 경제적도움이라도 줄 것을 공사당위회의에서 제기하였는데 그 제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여 그들에게 매 계도마다 생활보조금 20원에서부터 40원까지 주게 결정되였다.
자금을 해결하기 위하여 림송엽 서기가 공사내에 있는 기업들을 찾아다니면서 사연을 말하자 기업의 책임자들은 로인들을 존중하고 높이 모시는 것은 조선족의 전통미덕이라고 하면서 저마다 찬성을 표시하였다. 당시 동성용공사에는 전국적으로도 소문이 난 농기수리제조공장과 벽돌공장, 목제품가공공장, 종이공장, 세멘트제품가공공장 등 기업들이 있어 문제는 무난하게 풀렸다.
그런데 이렇게 2년 좌우가 지난 82년도 봄, 퇴직하는 사람들의 수가 50여명에 달하였다. 급속하게 늘어나는 로인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성용공사에서는 거의 해마다 자치주성립 기념날인 9월 3일을 계기로 대형운동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때면 2만여명이 살고 있는 동성용공사는 명절의 분기위기로 들끓었다. 하지만 마을의 독보조만 다니던 년로한 로인들은 가석하게도 참가하지 못하고 집을 지키거나 혹은 자식들의 도움으로 운동구경을 왔다고 해도 그저 나무그늘밑에 앉아있기가 일쑤였다.
로인들 수가 점점 늘어난다는 점을 언녕 보아낸 림송엽 서기는 그해 3월의 한 저녁에 있은 공사당위위원회의에서 로인들에 대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였다. 내용은 로인들께 경제보조를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점차 많은 수량으로 늘어나는 그들의 만년행복을 위하여 어떤 명절같은 것을 만들자는 것이였다. 그렇게 한창 회의를 하고 있는데 당시 중공연변주위서기로 사업하던 조남기 서기가 회의장소를 찾았다. 당시 조남기 서기는 농촌실정을 조사하러 동성용공사로 자주 다녔다.
“무슨 회의를 하고 있소?” 회의실에 들어선 조남기 서기가 물었다.
그러자 림송엽은 사회적으로 로인들의 수가 날따라 늘어가는 정황에 비추어 로인들이 만년을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기 위하여 명절을 만들수 없겠는가 하는 회의를 하는 중이라고 회보하였다. 그 말을 듣고 조남기 서기는 아주 기뻐하면서 고무, 격려했다.
“좋은 생각이오. 동성용공사에서 먼저 그런 명절을 발기하고 경축하기를 바라오. 그러면 그 경험을 전주에 보급하겠으니 구체적으로 잘 토론해보오”
조남기 서기의 고무와 지지를 받게 되며 이 일은 림송엽이 책임지고 추진하기로 하였다.
반복적인 연구와 토론을 거쳐 조선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속 발양하여 로인들을 공경하고 사회지위를 높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로인들을 우대하는 날을 결정하되 그 이름을 ‘로인절’이라고 하며 현유의 ‘로인독보조’를 ‘로년협회’로 개칭하고 각 대대에 협회를 두는 한편 전공사에 총협회를 둘 것을 선포, 또 초대회장으로 동성용공사농기관리소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한 황종원(1928년생)을 추대하고 공사의 사무청사 2층회의실을 전문적으로 로년협회 활동장소로 내여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날자를 정함에 있어서 간고한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등 전역에서 용맹을 떨치던 사람들이 인제는 로인으로 되였는데 그들의 공적을 기리면서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투항을 선포한 ‘8월 15일’ 즉 광복의 날을 로인들을 위로하는 날로 정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제의가 나왔으며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찬성을 표했다.
그러던 1982년 7월 9일 왕청현 배초구진에서 전주정신문명회의가 열리게 되였는데 림송엽도 참가하였다. 그날 관중석에 앉은 림송엽을 첫눈에 보아낸 조남기 서기는 회의가 끝난 다음 일부러 림송엽을 찾아 로인절 준비에 대하여 문의했다. 그래서 림송엽은 양력 8월 15일로 날자를 정했다고 회보하려던 참이라고 하자 조남기 서기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잘 준비하여 성공하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날자가 확정되자 림송엽은 계획을 세우고 각 대대의 서기, 주임, 부녀주임, 로년협회 회장 등을 불러 임무를 포치하였다. 그날 행사에서 로년운동회, ‘훌륭한 며느리’, ‘훌륭한 사위’ 등 표창대회를 열고 상품을 발금하도록 결정지었다.
로인절을 쇤다는 소문이 날개가 돋힌 것처럼 전공사에 퍼지자 모두들 환락 속에서 들끓으며 저마다 준비에 서둘렀다. 드디여 8월 15일이 되자 중학교마당에는 여느 때보다 사람들이 많이모였다. 대회에 참가하러 온 로인들 저마다 만면에 웃음을 담고 새옷을 떨쳐입은 맵시로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소녀들을 앞세우고 기쁨을 만끽하였다. 축제는 예기한 목적을 훨씬 초과하였기에 조남기 서기를 비롯한 주당위와 주정부 그리고 사회 각계에서는 칭찬이 자자했다.
이날 주 지도자들인 전인영, 김승옥, 김동기, 교수귀, 려영준, 허복순, 김성우, 최동광, 지희겸, 연변군분구 수장들인 모수채, 신룡희 그리고 연길현의 지도자들은 경축활동에 참석하여 로인들에게 명절의 축하를 드렸다. 그리고 토지개혁 때 연변에서 사업한적 있는 국가문화부 민족문화예술사 사장 관학동 동지가 아침차로 연길에 도착한 후 동성용공사에서 로인절을 쇤다는 말을 듣고 온갖 피로를 무릅쓰고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렇게 1982년에 동성용공사에서 중국의 첫 로년협회가 탄생되였고 처음으로 로인절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였다. 이듬해 림송엽 서기는 주정부로부터 8월에 연변에서 전국소수민족문화사업회의가 열리게 되는데 회의에서는 동성용공사의 로인절 경축활동참관이 주요한 절차임으로 잘 준비하라는 통지를 받게 되였다. 이에 림송엽은 우선 먼저 대회준비사업을 빈틈없이 짜는 한편 시간이 긴박한 정황 하에서도 동성중학교마당에 주석대를 건설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뛰여다녔다. 그는 유관인원들을 모여놓고 임무를 포치하였는데 총지휘로는 림송엽과 박승화(당시 공사당위위원이였음)가 맡고 무대를 만드는 벽돌과 기초돌은 공사내의 벽돌공장, 채석장에서 책임지고 건축은 공사건축대에 맡기기로 하였는데 세멘트는 공사수리소에서 30톤을 지원하여 기한전에 무대를 다 만들었다.
1983년 8월 15일 국가문화부, 중앙선전부, 민족사무위원회, 중앙텔레비전방송국을 비롯한 여러 관계부문과 전국 각지에서 온 여러 민족대표 100명이 주석대에 앉았는데 림송엽 서기는 또 그들을 위하여 초모자까지 일일이 준비해놓았다. 그날 2천여명의 손님들과 2만여명의 관중들이 모였으며 900여명이 참가한 집단민속가무공연이 있은 다음 동성중학교운동장에 길이가 200백여미터가 되게 연회상을 차려놓고 로인들을 존경하는 조선족의 근로하고 지혜로운 품성, 미풍량속을 자랑하면서 전통문화와 회갑연을 베풀고 조선족의 춤과 노래를 마음껏 선보였다.
이렇게 1982년도에 연길현 동성용진에서 처음으로 조남기 서기와 주정부 조룡호 주장을 비롯한 각급 지도자들의 관심과 동성용공사 당위 림송엽의 노력 그리고 전체 동성용공사 사원들의 노력으로 발기된 로인절을 계기로 1984년 중공연변주위에서는 정식으로 8월 15일을 로인절로 채택할 것을 결정하고 주인대상무위원의 비준을 거쳐 전주에 보급시키기 시작하였다.
그후로부터 8월 15일은 로인들의 명절로 되여 해마다 기꺼이 경축하게 되였으며 환갑, 회혼례 등 축수연 잔치를 치르는 현상도 많게 되였다. 이렇게 탄생된 로인절은 지금 연변은 물론 전국적으로 나가가서는 해내외에서도 널리 알고있는 명절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였다.
그리고 이날이 되면 거의 지정곡으로 불리우는 노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인들이 널리 알고 있는 ‘오래오래 앉으세요’라는 노래이다.
오늘은 온 집안에 기쁨이 넘치는 날
어머니를 높이 모신 환갑날이랍니다.
아 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
아들며느리 차린 큰상 어서 받으세요…
/림송엽 구술, 박용일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