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리은기 ‘중국 좋은 사람’ 입선... 렬사기념비 60년 지켜

신시대 감동시킨 묘지기, 평생을 렬사기념비 수호에 바쳐

1932년 7월생인 조선족 로당원 고 리은기 선생(1932년~2022년)은 생전 길림성 룡정시 삼합진 삼합촌 촌민이였다. 그는 60년간 자발적으로 당원을 조직하여 앞장서 혁명렬사기념비를 수호했다. 긴 세월이였다. 선생은 시종 초심을 잊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면서 한페지 한페지 감동의 력사를 기록해왔다. 반세기 동안 홍색정신을 몸소 실행해온 선생은 최근 2023년 1분기 ‘중국 좋은 사람’(성실신용)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중국 좋은 사람’은 중앙문명판공실이 전개하는 ‘신변의 좋은 사람 추천’ 선정의 최고 영예이다.

‘산산진달래, 촌촌렬사비’는 저명 시인 하경지의 로혁명근거지-‘연변’에 대한 진실한 묘사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4.33만평방미터의 연변의 부동한 력사시기 렬사는 도합 17740명, 혁명력사유적지는 1200여곳에 달한다. 지금 이 혁명열토에는 341개의 혁명렬사기념비가 중화민족의 신앙마냥 우뚝 솟아있는데 삼합촌 혁명렬사기념비가 바로 그 중 하나이다. 기념비는 혁명선렬들이 민족독립, 인민해방과 국가부강을 위해 혁명한 렬사들에 대한 력사적체현이자 더우기는 후세의 깊은 추모와 무한한 경의를 담고 있다.

초심을 명기한 60년, 묵묵히 비석을 지키다

1964년, 혁명렬사기념비 하나가 삼합진 청천촌에 건설되였다. 기념비가 건설된 후 당시 청천촌 서기였던 선생은 자발적으로 마을의 당원 30여명을 조직하여 의무성묘호묘대를 설립하고 렬사들을 위해 성묘했다. 그때의 선생은 30대 초반 청년으로 젊고 활력이 넘쳤다. 그는 청명절에 기념비를 찾아 영웅들을 기렸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늘 학교, 촌부에 가서 혁명선렬들의 영웅사적을 강연하고 전 촌에 ‘영웅을 존경하고 영웅을 수호하며 영웅사적을 전파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후 그는 매년 제사를 지내며 기념비를 보살폈다. 방화, 청소, 보수… 이러한 작업은 무려 60년 춘추, 2만여일 동안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삶이 다할 때까지 오로지 홍색정신으로 혁명렬사기념비를 지켜왔던 것이다. 또 해마다 청명절, ‘8.1건군절’이면 선생은 의무해설원으로 나서서 당원간부와 군중들에게 혁명선렬들의 영웅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선렬의 정신을 기리며 평생을 비석과 함께 살다

근 60년간의 풍상설우를 이겨내면서 선생은 이미 이 땅에 뜨거운 피를 뿌려 조국을 지킨 영렬들과 ‘생사지교’로 되였다. 선생은 영렬들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 혈육의 이야기처럼 구체적으로 학습, 선전해왔다. 어느 한번 그는 기념비의 이름을 가리키며 “이 전사의 이름은 전동학이다.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고향을 떠나 전투에 참가했다. 자기 딸의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의 안해 림계순이 혼자 딸을 키웠다. 또 19살밖에 안된 김봉산은 항일유격대원으로 적들의 포위를 당했는데 불에 타 희생했다… 전동학, 김봉산 같은 렬사는 수없이 많으며 그들은 선혈로써 조국의 승리를 이뤄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조국의 번영과 창성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의 부강하는 조국을 보지도 못한채 영원히 잠들었다. 우리는 반드시 감사한 마음으로 혁명영웅들을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렬사 중에는 선생의 어릴적 동무들도 적지 않았다. 오정묵, 박춘식, 허인권, 리동식… 선생은 비석에 새겨진 이들의 이름자를 닦아주며 이 옛친구들에게 오늘날 고향 변화와 조국의 천지개벽 발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군 한다.

민족풍습에 따르면 제사의식이 끝나면 제사자는 묘비 앞에서 가져온 음식과 술을 먹으며 편안히 고인과 오늘의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자리에 앉아 잔을 들고서 “오늘의 승리와 행복을 있게 한 혁명영웅들을 잊지 말자. 건배!”라고 말하며 한잔 마시군 했단다. 산 언덕마다에 푸른 빛이 감도는 동시에 떨기떨기 진달래꽃이 봉오리를 터뜨리는 그 계절, 멀지않아 온 산천은 분홍빛을 띠게 될 것이다. 이에 선생은 “그것은 영웅들의 장엄한 령혼의 화신이다. 그들은 곧 이 대지를 아름답게 수놓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후 2019년, 선생은 신체상황이 갈수록 나빠져 기념비에 자주 가서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였으나 기념비 상황을 줄곧 념려해왔다. 삼합진당위원회는 선생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자금을 조달하여 그에게 기념비와 100미터도 안되는 곳에 당원애심아파트를 세워주었다. 이로써 선생은 매일 혁명렬사기념비를 지킬 수 있었다…

특수한 고별, 홍색정신은 길이길이 이어지리

선생은 평생 ‘홍색유전자전승’을 렬사들에 대한 약속과 신념으로 삼고 의무적으로 오로강연원을 맡아 홍색력사와 혁명이야기를 전파했다. 그의 인솔 하에 당원, 군중 및 주삼합 군경간부들은 분분히 홍색강연대오에 가입했다.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혁명력사를 강연하고 홍색유전자를 전승하는 열풍이 일어난 것이다.

촌민들은 기념일만 되면 선생이 비틀거리면서 렬사기념비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선생은 “생전에 비록 우리가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모두 애국심을 갖고 있다. 지금 우리는 좋은 세상을 살고 있다. 영웅들이 오늘의 좋은 날을 바꿔왔다. 모두들 조직하여 이렇게 기념비를 찾는데 이는 인민이 영웅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2022년 12월 16일, 병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한 선생은 90세를 일기로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일생을 마쳤다. 림종 전 선생은 친필 감사편지를 써 수십년 동안 관심과 배려를 해준 당조직에 감사의 마음을 밝혔다.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고향 서래하에 뿌려져 고향 렬사들을 영원히 지키게 되였다.

그의 사적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그를 이어 렬사기념비를 지켜줄 사람들과 단체들도 나타났다. 금전만능의 시대, 이것이야말로 신시대의 신기상, 신작위가 아닌가!

그의 정신은 한세대 또 한세대의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과 영향을 준다. 현재 청천혁명렬사기념비는 이미 당지 촌민과 애국주의혁명전통교육기지로 되였다. 매년 청명절이면 당원, 군중, 군경간부들은 자발적으로 렬사묘 앞에 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렬사들의 영용한 사적을 학습하고 직접 만든 백화를 놓으며 혁명선렬들을 추모한다.

선생은 이렇듯 60년 세월 동안 렬사들을 향한 애도를 실천했고 몸소 63년당령의 당성 고수를 해석했으며 성실하고 신용을 지키는 고상한 정조로 혁명력사들을 수호하고 위대한 홍색정신을 후세에 물려주었다.

/류설화 기자